Posted on 오후 8:24 | By 류창현 | In 류창현 선교사의 선교단상
고백해야겠다.
주일 날 목사가 예배시간에 헌금을 안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 희귀성에 있어서 신문에 날만한 스캔들이다. 목사 자신도 많은 성도들 앞에서 낮 뜨거워짐을 느꼈으니, 목사가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을 본 성도가 있었다면 얼마나 기이하게 생각했겠는가 말이다.
사정은 이렇다. 언제가 부터 출근길 지나는 사거리 종종 만나는 할아버지가 있다. 겨울 그 추운 날에도 어김없이 그는 개털 모자를 쓰고 거기에 서 있었다. 그 길은 가운데 전차길이 있어 차량들이 신호대기를 오래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를 오래 대하고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차창 너머로 보는 할아버지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왼손으로는 일 루불을 달라는 시늉인 듯 두 째 손가락 하나를 펴 새우고 그는 표정으로 구걸을 한다. 대부분 차량은 그를 지나친다. 그러면 지나치는 차량에 대하여 손을 좌우로 벌려, 주지 않고 가는 차량에 알 수 없다는 듯 그 서양인의 표정을 짓곤 한다. 내 차가 그 곳 신호대기에 걸려 할아버지 앞에 설 때면 그는 어김없이 내 차창을 향하여 그 일루불의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 천진한 표정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창문을 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제 내차를 알아본다. 많지 않은 동양인 중 하나가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고마운지 그도 나에게 이빨을 벌리며 씩 웃어준다. 신호 대기를 받지 못하고 그 사거리를 빠르게 지나칠 때면 할아버지와 눈인사를 하지 못하고 통과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 그는 내차가 멀찍이 서있는 데도 어김없이 불편한 다리를 절며 다가왔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는 어디가 아프신가 하는 생각이 났고, 다음 날 대하면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아프신 것 같지는 않군요! 다행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다 정말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한주간이 지나고서야 얼굴을 대하게 되면서 확실히 아픈 기색보고, 많이 아프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도리어 내 표정이 굳어진 것 같아 짐짓 웃어주며 창문을 연다. 대화할 수 없는 짧은 시간 뒤차가 빨리 가지 않는다고 빵빵거렸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줬다.
주일 날, 그날도 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한 주 만에 만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주머니를 뒤졌지만 잔돈이 없었다. 옷을 바꾸어 입은 것이 생각났다. 지갑은 챙기면서 잔돈은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차창문은 열었고,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고, 짧은 시간, 많은 망설임 속에 별수 없이 내가 주었던 것은 교회에 헌금하고자 했던 단 한 장의 지폐였다. 물론 평소 내가 그분에게 주었던 것에 비하면 큰돈임에는 틀림없다. 그날따라 내게 다른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예배 시간 헌금이 없다는 이유로 마음 한 편이 편하지 않았다. 성도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헌금 주머니가 내 앞에 왔는데도 나는 짐짓 모른 체 했어야 했었다.
< 헌금을 거두는 자매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많은 이들이 쳐다보고 있는 강대상앞에 선 목사가 헌금도 하지 않았음을 본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외식이야!> 이런 저런 생각에 <에이 모르겠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 아니냐!>하는 스스로 자기위안을 가졌다. 그러다가 목사가 <믿음 약한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헌금을 조금 누구에게 빌릴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예배 후 한 자매가 나를 찾아와, 봉투를 내민다. “ 목사님! 이것 적은 것이지만 목사님 개인의 필요를 위해서 사용하세요.” 한다.
봉투에는 내가 오늘 구걸하는 할아버지에게 주었던 것에 비해 더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나의 생활이 분명이 그 자매보다 나은데 그 자매가 나에게 베푸는 마음은 나의 선교사로서 삶의 수고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리라.
나는 깨어졌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나에게 어김없이 말씀하신다. <나에게 인색한 자여 나는 너에게 항상 후히 베풀지 않느냐!> 나는 구걸하는 할아버지를 정말 마음으로 돕기보다, 그것을 도와준다는 자체 즐거움으로 여기며 잔돈이나 쥐어주는 행위를 반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잔돈이 있었다면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오백 루불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다 만약 잔돈이 없는 줄 알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창문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내가 하나님으로 부터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들어내는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평신도인 한 자매로 부터 배운다. 평범한 믿음의 삶속에서 남에게 베풀데 힘에 지나게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함을...
* 이 게시물은 2006년도 이전 미르 선교회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주일 날 목사가 예배시간에 헌금을 안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 희귀성에 있어서 신문에 날만한 스캔들이다. 목사 자신도 많은 성도들 앞에서 낮 뜨거워짐을 느꼈으니, 목사가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을 본 성도가 있었다면 얼마나 기이하게 생각했겠는가 말이다.
사정은 이렇다. 언제가 부터 출근길 지나는 사거리 종종 만나는 할아버지가 있다. 겨울 그 추운 날에도 어김없이 그는 개털 모자를 쓰고 거기에 서 있었다. 그 길은 가운데 전차길이 있어 차량들이 신호대기를 오래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를 오래 대하고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차창 너머로 보는 할아버지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왼손으로는 일 루불을 달라는 시늉인 듯 두 째 손가락 하나를 펴 새우고 그는 표정으로 구걸을 한다. 대부분 차량은 그를 지나친다. 그러면 지나치는 차량에 대하여 손을 좌우로 벌려, 주지 않고 가는 차량에 알 수 없다는 듯 그 서양인의 표정을 짓곤 한다. 내 차가 그 곳 신호대기에 걸려 할아버지 앞에 설 때면 그는 어김없이 내 차창을 향하여 그 일루불의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 천진한 표정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창문을 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제 내차를 알아본다. 많지 않은 동양인 중 하나가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고마운지 그도 나에게 이빨을 벌리며 씩 웃어준다. 신호 대기를 받지 못하고 그 사거리를 빠르게 지나칠 때면 할아버지와 눈인사를 하지 못하고 통과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 그는 내차가 멀찍이 서있는 데도 어김없이 불편한 다리를 절며 다가왔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는 어디가 아프신가 하는 생각이 났고, 다음 날 대하면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아프신 것 같지는 않군요! 다행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다 정말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한주간이 지나고서야 얼굴을 대하게 되면서 확실히 아픈 기색보고, 많이 아프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도리어 내 표정이 굳어진 것 같아 짐짓 웃어주며 창문을 연다. 대화할 수 없는 짧은 시간 뒤차가 빨리 가지 않는다고 빵빵거렸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줬다.
주일 날, 그날도 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한 주 만에 만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주머니를 뒤졌지만 잔돈이 없었다. 옷을 바꾸어 입은 것이 생각났다. 지갑은 챙기면서 잔돈은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차창문은 열었고,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고, 짧은 시간, 많은 망설임 속에 별수 없이 내가 주었던 것은 교회에 헌금하고자 했던 단 한 장의 지폐였다. 물론 평소 내가 그분에게 주었던 것에 비하면 큰돈임에는 틀림없다. 그날따라 내게 다른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예배 시간 헌금이 없다는 이유로 마음 한 편이 편하지 않았다. 성도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헌금 주머니가 내 앞에 왔는데도 나는 짐짓 모른 체 했어야 했었다.
< 헌금을 거두는 자매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많은 이들이 쳐다보고 있는 강대상앞에 선 목사가 헌금도 하지 않았음을 본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외식이야!> 이런 저런 생각에 <에이 모르겠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 아니냐!>하는 스스로 자기위안을 가졌다. 그러다가 목사가 <믿음 약한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헌금을 조금 누구에게 빌릴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예배 후 한 자매가 나를 찾아와, 봉투를 내민다. “ 목사님! 이것 적은 것이지만 목사님 개인의 필요를 위해서 사용하세요.” 한다.
봉투에는 내가 오늘 구걸하는 할아버지에게 주었던 것에 비해 더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나의 생활이 분명이 그 자매보다 나은데 그 자매가 나에게 베푸는 마음은 나의 선교사로서 삶의 수고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리라.
나는 깨어졌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나에게 어김없이 말씀하신다. <나에게 인색한 자여 나는 너에게 항상 후히 베풀지 않느냐!> 나는 구걸하는 할아버지를 정말 마음으로 돕기보다, 그것을 도와준다는 자체 즐거움으로 여기며 잔돈이나 쥐어주는 행위를 반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잔돈이 있었다면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오백 루불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다 만약 잔돈이 없는 줄 알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창문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내가 하나님으로 부터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들어내는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평신도인 한 자매로 부터 배운다. 평범한 믿음의 삶속에서 남에게 베풀데 힘에 지나게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함을...
* 이 게시물은 2006년도 이전 미르 선교회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입니다.